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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연말결산: 가장 중요한 것, 마음 돌보기, 인연과 신뢰, 커뮤니티

30대의 마지막 해인 2022년이 끝나갑니다. 얼마전에 유튜브에서 알쓸인잡 영상을 보는데, 김영하 작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인생이 (...) 마디가 많은 게 좋다고 생각해요. 과거를 동영상으로 기억하지 않는대요. 우리는 딱딱 어떤 에피소드만 기억하는 거예요.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언제 무슨 일이 있었고. 그렇다면 조촐하게 뭔가를 만들고 기념할 만한 걸 하고 선물을 주고 이거는 인생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인 것 같아요.

2022년은 저에겐 굉장히 아픈 한 해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올해 4월, 어머니가 1년여에 걸친 암 투병 끝에 돌아가셨습니다. 시작부터 가족사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일련의 시간이 저에게 끼친 영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저는 틈틈이 애도작업을 하며 이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중이라, 아직 생각이 완결되진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시점의 생각을 글로 남기는 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올 한 해를 기념하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풍요롭게 마무리하기 위해, 저 스스로에게 선물을 준다는 마음으로 연말결산 글을 써 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일, 또는 성공은 아니었다.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 강하게 사로잡힌 채로 30대를 지나왔습니다.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싶고, 이름을 남기고 싶고,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일을 다른 무엇보다 높은 우선순위에 두었고, 일과 저를 동일시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제가 만족할 수 있는 성취를 할 수 있을지가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일이 잘 되고 좋은 성과가 나올 때면 저라는 사람의 가치가 하늘 높이 치솟는 것 같았고, 일이 잘 되지 않아 좌절감을 느낄 때면 제 가치도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큰 애착을 갖고 있던 회사를 나올 때는 제 정체성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암 환자들 10명 중 7명이 5년 이상 생존하는 시대에 기대여명이 1년 밖에 되지 않는 암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그런 암으로 진단 받으시니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졌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일에 몰입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작년(2021년) 여름에는 어머니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회사를 그만뒀습니다.[1] [2]


  1. 요즘 '없는 게 없는 무한도전' 밈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결정에도 무한도전의 영향이 컸습니다. 작년(2021년) 여름 어느 날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 편을 다시 보는데, 가수 바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실 무렵 뮤지컬을 하고 있었는데, 일을 하지 않고 어머니 곁에 있을 걸 그랬다'라며 후회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저는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서 어머니 곁에 있어드리기로 했습니다. ↩︎

  2. 그럼에도 어느 정도 수입은 필요했기에 고육지책으로 택한 일이 스타트업 컨설팅과 자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이트도 만들게 됐구요. ↩︎

한창 일하면서 커리어를 쌓아야 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 30대 후반이라는 나이였는데, 일을 쉬며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1년이 될지 아니면 몇 년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그 시간이 하루라도 더 길기를 원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일을 쉬면 어쩌면 나중에는 나를 원하는 회사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망설임 없이 결정했고, 지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결정 덕분에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어머니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안녕히 주무셨냐고 인사하고, 끼니 때마다 식탁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 9시가 되면 EBS <세계테마기행>으로 세계 곳곳의 모습을 보며 함께 감탄하고, 컨디션이 좋으실 때면 동네 카페에 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파스타를 함께 먹는 그런 시간들이 제겐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어머니는 암성 통증으로 아프고 항암 치료로 지치신 와중에도 제가 옆에 있어줘서 행복하다고 말씀해 주셨고, 저도 어머니와 함께 있어서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 결정이 아니었으면 어머니는 지인들도 마음 놓고 만나지 못하는 코로나 시국에 (더더군다나 면역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혼자 아프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셔야 했을 거고, 저는 저대로 죄를 짓는 마음으로 살아야 했을 테니까요.

그 시간 덕분에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이 '일' 혹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다시 회사에 속해서 일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한 가지 기억이 더 떠올라서 좀 더 써내려 봅니다. 어머니가 미리 남겨 두신 유언에 따라 저희 가족은 조문객을 받지 않고 가족장을 치렀습니다. 조문객도 없었고 친척들도 잠깐씩만 다녀갔기 때문에, 저와 형, 그리고 형수님까지 세 사람이 조용히 빈소를 지켰습니다.

조문객이 없으면 쓸쓸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워낙 많은 분이 조문을 오셔서 장례식 기간 내내 손님맞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조문객이 없으니 오히려 어머니를 생각할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좋았습니다. 조용한 빈소에서 셋이서 어머니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시간도 저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어머니가 저와 형에게 마지막으로 남겨 주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대단한 성취를 하고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이때도 하게 됐습니다.

마음을 돌보는 시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 정도는 정말 힘들었던 기억입니다. 그나마 하고 있던 몇 안되는 일도 모두 그만두고 집에만 있었으니, 어딘가 몰두하면서 주의를 돌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강아지를 산책시켜야 해서 하루에 한 번 밖에 나가서 걸었던 덕분에, 그리고 친구들이 저를 불러내서 함께 있어 준 덕분에 기운을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운을 낸 김에 좀 더 잘 살고 싶어서 한 달 반에 걸쳐 심리상담을 받았습니다.[1] 상담을 받다 보니, 그동안 겪은 상실들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에 가려져 있었지만) 저에게 꽤 깊은 상처를 남겼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나 자신과 동일시하다시피 하며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회사를 떠나면서 겪은 상실, 인간관계에서의 상실 등등... 남들 앞에서는 하기 힘든 얘기들을 상담이라는 기회를 빌어 입 밖으로 꺼내고, 상담사 선생님으로부터 공감과 격려를 받고, 집에 와서는 글을 쓰며 제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면서 일련의 일들이 저에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며 어떻게 제 마음을 돌보고 제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까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1. 사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어머니가 입원하셔서 시간이 잠깐 생겼을 때 답답하고 우울한 마음에 심리상담을 받았습니다. 그때 상담사 선생님이 긴 시간 간병 후에는 허무감에 빠지기 쉬우니 나중에 꼭 상담을 받으라고 권했고, 저는 그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이 아니었으면 그저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만약 곧바로 직장을 구하고 일에 몰두했다면 괴로움은 잊을 수 있었겠지만, 천천히 제 마음을 돌보는 시간은 가질 수 없었겠죠. 앞으로도 제 인생에 큰 충격을 주는 일을 겪게 될 때면, 다른 데 몰두하면서 그 충격을 외면하려 하기보다는 잠깐 멈춰서 제 마음을 세심하게 돌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인연과 신뢰의 힘: Long-term games with long-term people

저는 올해 8월부터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를 만드는 스티비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습니다. 공동대표인 임호열 님은 2016년에 이메일 마케팅 컨퍼런스 컨텐츠로 알게 돼서 그 이후에도 모임('그로스/데이터분석 동업자 커뮤니티'라는 이름으로 2018년 초부터 2020년 중반까지 운영한 모임입니다)에서 종종 만났고, 모임 종료 후에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올해 봄에 호열님이 '스티비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를 채용하는데, 민우님과 함께 일하고 싶다'라고 연락을 주셨고, 장시간의 대화와 숙고 끝에 팀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스티비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데는 다른 이유도 몇 가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그동안 알고 지내면서 봤던 호열님의 모습에서 '이 분이 대표로 있는 회사니까 믿고 함께 일해도 좋겠다'라는 신뢰가 들었던 것이 가장 컸습니다.

팀에 합류하고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만족스럽게 회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들어가는 회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신뢰를 쌓는 일인데, 몇 년 동안 서로 만나면서 쌓인 신뢰가 있어서인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한결 덜어진 느낌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이런 인연과 신뢰의 힘이 많이 작용할 것 같습니다. Naval Ravikant가 <Play Long-term Games With Long-term People>에서 강조한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진정성을 보인 사람들은 서로를 신뢰하게 되고, 신뢰가 있으면 많은 일이 쉬워지니까요.

커뮤니티가 (지금도) 필요해

<외로운 PM/PO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습니다.> 글을 썼던 게 올해 3월이었으니, 벌써 9달이 지났네요. 글을 쓰고 며칠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급격하게 몸이 안 좋아지시는 바람에 더 이상 진행을 못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쉽기도 하고, 커뮤니티에 관심 보여주신 분들에게 죄송하기도 한 마음입니다.

위 글에서 얘기한 '가깝고 깊은 관계', '지식이 아니라 취약성vulnerability을 중심으로 교류하는 커뮤니티', '작고 안전한 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지금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다시 커뮤니티 만들기에 시동을 걸어 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꼭 PM/PO라는 특정 직군에만 국한된 모임일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처음 계획과는 다른 커뮤니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작업을 혼자 하지 않고, 파트너들을 모아 함께 시작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할 때보다 동료들과 함께할 때 좀 더 실행력과 추진력도 생기고, 지치지 않고 오래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커뮤니티를 만드는 작업에 관심 있으신 분은 메일 주세요. 어떤 동기를 갖고 계신지(어떤 점에서 함께하고 싶으신지, 커뮤니티를 통해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고 싶으신지 등등)도 간단히 알려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

처음엔 그저 어렴풋했던 생각들이 글을 쓰면서 조금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 지난 한 해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저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겠다는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한 것 같은데, 읽는 여러분은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요. 여러분도 기회가 닿는다면 2022년을 돌아보면서 정리하는 기회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연말 보내세요.